사건: 2009 재노 78
피고인 : 김판수
존경하는 재판장님,
귀 법원에서 공문으로 보내주신 위의 사건 재심청구통지서와 의견요청서를 각각 받았습니다. 무려 40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다시 법의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우리 생애에서 어쩌면 잊혀진 역사로 묻혀버릴 뻔 했던 본 사건의 두 피고인 박노수 및 김규남 씨, 아직 표정과 말투가 생생한 두 분의 죽음을 저는 새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아서 재심청구이유서라도 쓸 수 있는 본인과 달리, 그 두 분의 영혼은 아직도 편히 쉴 곳을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것 같아서 제 가슴은 미어지는 듯합니다. 또한 눈물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두 분의 남은 가족들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의 길고도 깊었던 슬픔과 고통을, 그리고 40년의 세월 동안 호소할 곳조차 없던 신산한 삶을, 무엇보다 두 사람의 억울한 죽음을, 누가 어떻게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동안 저 스스로 수없이 묻고 또 물었던 질문입니다.
사건 당사자로서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재심청구인이자 피고인으로서 저는 지금 조심스럽게 이 의견서를 쓰고 있습니다. 서툴게나마 당시 사건에 대한 꾸밈없는 사실이나 진실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담아낼 수 있다면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꽤 의미 있는 증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입니다. 더욱이 재판장님을 포함한 세 분 판사님들의 직책 및 성함과 함께, 반듯하고 똑똑하게 적혀있는 각자의 날인에 주목하면서 저는 예사롭지 않은 희망과 신뢰, 그리고 본 재심에서의 진실규명에 대한 진정성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날인은, 재심청구에 있어서 일상적인 관행이나 요식행위로 의견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 분 법관의 이름과 명예를 걸고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고, 현명하고 지혜로운 법률적 판단을 추구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으로 읽혀졌습니다.
우리 보통 사람은 거대하고 막강한 공권력 앞에서 한없이 작고 무력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의견서가 본 사건의 피고인과 그 가족들이 겪었을 실의와 좌절, 눈물과 고통, 간절한 소망을 판사님들께서 이해하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정말 다행이고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본인과 박노수, 김규남 피고인의 가족들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하게 된 것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진상조사 위원회’의 재심 권고 결정문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진실·화해 위원회’에 저희들 사건의 재조사와 진실규명을 청원했던 것은 저 개인의 현실적 이득을 기대했기 때문은 아닙니다. 재판 결과에 따른 실리에는 도리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죄에 대한 법률적 판단, 명예회복 또는 진실의 규명이 이 시점에선 훨씬 유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당시 냉전시대의 지배이념이었던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고, 당시 사건의 조사 및 재판과정에서 혐의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던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같은 실정법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는 현실입니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 일을 뒤늦게나마 다시 논의하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 없었습니다.
본인은 이 사건으로 5년여의 징역을 살았습니다. 형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했지만 그 후 오랜 기간(적어도 5년~10년) 유무형으로 사회활동에 제한을 받았습니다.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고통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과 인내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건과 관련된 본인의 범법행위 자체 또는 5년 징역이라는 과도한 형량에 관해서 마음속으로 크게 부끄러워한 적이 없고 억울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크게 후회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속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 사건의 모든 피고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반공법이나 국가보안법 등의 실정법을 부분적으로 위반했다는 걸 인정하긴 하지만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북한을 이념적으로 추종한다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가당찮은 소리입니다. 조국을 배신했다거나 어느 누구에게 해악을 끼치는 생각이나 행동을 꿈에라도 한 적이 없다고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엄혹한 수형생활 속에서 인생의 황금기라는 청춘을 보내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잃었지만 대신 얻은 것 또한 적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러한 밑바닥 삶을 체험하지 못했더라면 지금까지 깨우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 저는 감옥에서 그런 진실에 눈뜰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웠습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사리를 옳게 분별하고 그 옳은 판단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삶의 확실한 지표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 소중한 깨달음을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기에 5년여의 감옥살이가 저에게는 그리 억울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1966년 봄 피고인 박노수 교수의 초청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할 무렵, 본인의 북한에 대한 지식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북한이나 남북관계에 대해서 무지, 무관심은 물론이고 북한사람이라면 뿔 달린 도깨비를 연상할 만큼 북에 관한 많은 것이 혐오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북한 정권과 인민을 구별할 줄도 모르는, 오로지 남한에서의 반공교육에 충실했을 뿐인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남북통일이라거나 평화통일 등의 개념에도 생소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기회도 관심도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캠브리지에서 북으로부터 우송된 화보, 신문/잡지를 우연히 접하게 됐고 그걸 통해 북한에 관련한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당시 유럽은 러시아나 동유럽 같은 공산국가와 내왕이 비교적 자유로왔습니다. 교내에 아무렇지도 않게 < 크레믈린궁 주말여행 > 같은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처음에 저는 그런 광고만 보고도 가슴이 덜컥 하곤 했었습니다. 아무튼 별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던 북한에 관련한 정보들은 저를 말할 수 없는 충격과 혼란 속에 빠뜨렸습니다. 이제까지 막연하게 추측했던 것과는 너무나 다른 현실, 한편으론 당혹스럽고 다른 한편으론 한국에서 받은 반공교육과 반공이념 전반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이 뭉게뭉게 커져갔습니다. 반신반의하는 가운데 북한의 실상을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남북관계와 통일의 전망에 대해서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애국심이랄까 정의감이랄까 하는 마음이 이국에서 공부하는 청년의 내부에서 자라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정열이 두려움 속에서도 동백림에 건너가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연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습니다. 그저 동백림에 가서 북한 대사관 사람들을 한번 만나본 것뿐이었습니다. 막상 그들을 만나 북한에 대해서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의문도 많아지고 실망도 커질 뿐이었습니다. 북한 체제의 전근대성과 폐쇄성, 그리고 우상숭배에 가까운 일인독재와 획일성 등 그들이 선전하고 주장하는 이념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는 도저히 없었습니다. 그러기에는 두 체제 사이에 너무 큰 장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실감할 뿐이었습니다.
이 사건 관련 피고인들 모두는 남한과 북한 두 체제의 역사적 배경, 체제의 장단점 그리고 남북의 평화적 통일의 방법 등에 대해서 학문적 관심이 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순수한 열정과 호기심으로 조국의 미래를 걱정했던 사람들입니다. 북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이 실정법에 위배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당시 자유로운 유럽 분위기 속에서 기회가 된다면 북한사람들과 그런 문제를 함께 토론하고 싶어했습니다. 1967년 소위 ‘동백림 간첩단 사건’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 당시 유럽에 체재하고 있던 지식인과 유학생들 사이엔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거나 공산주의 이념에 동조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비공개적인 접촉이 광범위하게 거의 관행처럼 이루어졌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이응로 화백, 작곡가 윤이상 선생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문제가 되었던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 교수 등의 사례가 저희들 사건과 매우 비슷한 경우였습니다.
위와 같은 정황과 맥락에서, 이 사건의 원인 제공자(?)인 박노수 피고인이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박노수 교수, 그는 자기의 사상이나 신념 또는 특정 정치권력을 위해 자기가 가진 전부를 희생시킬 수 있을 만큼 적극적이고 철저한 이념주의자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학문적 열정 이외엔 천진난만하다고 말해야 할 만큼 세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나이 겨우 서른 중반의 젊은 엘리트로서, 박교수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 국제(공)법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촉망 받는 유능한 학자였습니다. 고향 선배로서, 같은 한국인으로서, 그 분이 이룬 학문적 성취와 명성이 저희들의 뿌듯한 자랑이었음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온화하고 겸손한 품성이나 나라와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력, 남북관계에 대한 온건하고 유연한 사고 등 모든 면에서 우리가 본받고 싶은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사람이었고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 분의 죽음은 기나긴 세월을 뛰어 넘어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이따금 그의 티없는 웃음이나 표정이 떠올라 저는 지금도 가던 길을 멈춰서곤 합니다.
이제 와서 본 사건 피고인들의 완전한 결백을 주장하거나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순수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저희들이 북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사실은 엄연히 실정법 위반이었지요. 그러나 과연 그만한 과오로 한창 피어나는 젊고 유능한 학자를 사형시켜야 했을까요? 그냥 뒀으면 세계적인 석학으로 성장했을 엘리트의 목숨과 바꾸어서 우리가 얻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972년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박노수 피고인과 김규남 피고인은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사형선고를 확정 받고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어 재심을 청구 중에 있을 때였지요. 갑작스런 소식을 듣고 저는 일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가눌 길 없는 슬픔과 눈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두 분의 갑작스러운 사형집행은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렵이야말로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의 발표 직후였고 그 때문에 남북 간의 적대적 대치관계가 화해와 상호교류로 이어지리라고 한창 희망을 가질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40년간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그리고 그 당시의 공권력(정보기관과 사법부)에게 묻고 싶은 의문이 있습니다. 희망의 싹이 돋아나고 있을 바로 그 때 굳이 재심 중인 피고들을 벼락치듯 사형시켜야 했을까요? 그들의 생명을 빼앗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회는 정말 더 위험해졌을까요? 그들의 생명을 빼앗았기 때문에 우리사회가 더 안전하고 안심할 만한 곳이 됐을까요?
무려 1만여 매에 달한다는 저희들 사건의 심문조서, 공판기록 및 판결문만으로는 도저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없고 의문을 풀 수도 없습니다. 이 사건은 그 자체로 슬프고 가슴 아픈 우리 시대의 상처이자 치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서 이 사건의 진실을 증언하고 싶었습니다. 30~40년 후엔 상식이 되어버릴 생각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엄연히 실재합니다. 조국의 역사와 운명을 고민하는 젊은 열정이 법의 이름으로 교수형당했습니다. 행동이 아닌 머릿속 생각을 범죄로 몰아 사람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 사상의 자유가 허용된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진실이 아닌, 사법적 판단만으로 젊은 생명을 빼앗는 것은 국가의 이름을 빈 폭력이고 야만이라는 것을 항변하고 싶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리고 두 분 배석 판사님!
아마도 법조계의 원로이신 한승헌 변호사님을 아실 겁니다. 그 분은 이번 사건 피고인인 박노수 교수와 김규남 씨의 죽음을 애석해하고, 사형제도 또는 사형집행을 아쉬워하는 마음을 담은 ‘어떤 조사(弔辭)’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내용 때문에 구속되어 재판받고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형까지 사셨던 분입니다. 저와는 40년 전 이 사건의 재판과정에서 저의 변호인이었던 인연이 있지요. 그 분께서 최근 < 한 변호사의 고백과 증언 >이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시고, 출간기념 인터뷰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적어도 머리에 먹물이 좀 들어 있다는 지식인으로서 저 험난한 역사의 가시덤불을 헤치고 살아온 사람이라면 동 시대와 후대를 위해 증언자와 기록자로서의 책무가 있다고 믿는다.”
그 분의 소신과 용기에 늘 경의를 표해 왔던 저로서는 그 말씀이 가슴 깊이 들어와 박히는 것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박노수 교수에겐 당시 핏덩이였던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 아이는 이미 마흔이 넘었습니다. 인명은 어떤 가치보다 우선되는 고귀하고 유일한 가치가 아닙니까. 국가가 그 어린 핏덩이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았습니다. 당시 캠브리지 교수였던 한국 최고의 엘리트를 아버지로 가질 뻔 했던 아이가 고아가 되어, 간첩의 딸이 되어, 평생을 음지에서 어둡고 무거운 자의식의 늪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재판장님 아무쪼록 오랜 세월 희망에 목말라 했던 박노수 및 김규남 씨 가족들의 서러움을 씻어주십시오. 새로운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도록 지혜로운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조국을 위해 고민하고 토론하던 열정을 인정해주셔서 구천을 떠도는 그들의 한이 늦게마나 풀리게 되기를 간절히 빌겠습니다.
2009년 12월 21일
피고인 김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