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을 쓸까 꽤 오래 망설였습니다. 그럴듯한 말을 골라서 뻔한 덕담을 쓰는 것이 무난한 노릇이긴 하지만, 그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사 재단의 하나라는 걸 자인하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시작하는 이 문화재단은 비록 지금은 초라하지만, 흔치 않은 귀한 뜻을 씨앗으로 하여 출범하는 전혀 새로운 운동체의 하나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뭐가 새롭고 어떤 점이 귀한데?
그걸 얘기하자면 김판수라는 인물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가 이 재단의 아이디어를 내고 기금을 출연한 장본인이니까요. 나는 그의 오랜 친구로서 그의 뜻에 동조하는 역할밖에 한 게 없으니, 말하자면 들러리인 셈입니다.
김판수와 처음 인사를 나눈 건 1968년 봄쯤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대학 동기인 김신근이란 친구가 판수와 광주일고 동창이어서, 신근이가 다리를 놓았을 겁니다. 우리는 소개를 받자마자 금방 친해졌지요. 본능적으로 서로 동류라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셋이 등산도 자주 했지만, 차츰 신근이가 끼지 않아도 판수와 둘이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그의 자취집에도 놀러 갔어요. 당시 나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대학에서 조교 노릇을 막 시작한 터였고, 판수는 유학에서 돌아와 여동생과 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죠. 그 무렵 나는 김지하 같은 친구를 판수에게 소개했고, 지하는 또 다른 친구를 끌고 와서 판수의 여동생과 짝을 맺게도 했지요.
그렇게 지내던 1969년 5월 3일쯤이던가, 생면부지의 낯선 사내 둘이 혜화동 내 하숙집으로 들이닥쳐 잠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따라간 곳은 중구청 맞은편의 허름한 2층 건물이었는데, 알고 보니 중정(중앙정보부) 분실이었습니다. 회사로 위장하고 있었던 거죠. 어느 방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앉기도 전에 불문곡직 주먹이 날아왔어요. 이렇게 겁박을 하고 나서 그들이 다그쳐 묻는 것은 김신근이 있는 곳을 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렵 신근이는 고려대 대학원에 입학하고 숙소도 그쪽으로 옮겨서, 여러 달 만난 적이 없었지요. 결국 그들은 나를 대기실 같은 방으로 내보냈습니다. 거기에는 벌써 신근이의 고교 동창들 여러 명이 잡혀 와 매타작을 당한 뒤에 뻗어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그의 고교동창이자 내 대학 동기인 소설가 이청준도 섞여 있었지요.
하룻밤인가 자고 나서 풀려났는데, 열흘쯤 뒤에야 사건의 전모가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신문마다 1면 머리기사로 ‘유럽·일본을 통한 북괴 간첩단 사건’이라는 중정 발표가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던 거죠.(1969.5.14.) 김형욱 중정 부장의 기자회견, 관련자 60명, 현직 국회의원 김규남 포함, 동베를린 거쳐 평양 왕래, 공작금 갖고 반미·민중봉기 획책 등등 무시무시한 내용이 관련자들의 사진 및 조직도표와 함께 온통 지면을 도배하고 있었습니다.
신근이는 초장에 낌새를 채고 도망쳤다가 두 주일 만에 붙잡혔는데, 그동안 친척과 친구들이 잡혀가 닦달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였던 국제법학자 박노수 선생(1933.4.9.~1972.7.28.)과 국회의원 김규남 선생(1929.7.15.~1972.7.13.)은 사형선고를 받고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얼마 뒤에 사형이 집행되었고, 신근이와 판수는 7년형, 5년형을 선고받아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친구들이 ‘북괴 간첩’ 혐의로 잡혀간 것이 무서워 재판에도 한번 가보지 못했습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김판수 등의 사건은 1969년 11월 3일에 1심 선고, 1970년 3월 4일에 고법 판결이 났군요. 이렇게 친구들이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재판 끝에 감옥살이를 하는 참담한 동안에 나는 결혼도 하고 대학에 교수도 되었으니, 그것이 여태 털어놓지 못한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친구들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세상도 조금씩 나아졌고요. 전화위복이랄까, 판수는 감옥 안에서 일본어를 익히고 그 일본어로 도금에 대해 공부를 했다는군요. 원래 그는 영문학도였고, 영화를 전공하려고 외국에도 갔었는데 말입니다. 신근이는 한동안 시민운동 쪽에도 조금 관여하다가 한국 사회에 실망해서 멀리 이민을 갔고, 가서는 사람도 생각도 달라졌다는 슬픈 소식입니다.
반면에 김판수는 도금 기술을 바탕으로 작은 회사를 일구어 30년 가까이 지나자 이제는 아주 튼실한 중소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사이 나하고는 점점 더 가까워져서 온갖 의논을 해오고 주위의 많은 문인들을 사귀었습니다. 매년 4월 말 주식 배당금이 나올 무렵이면 그 중 상당액을 문학단체와 시민운동단체, 뜻있는 잡지와 개인들에게 기부했습니다. 내가 관여한 한국작가회의와 임화문학연구회에도 벌써 십수 년째 1천만 원, 500만 원씩을 후원했지요.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의 < 녹색평론 >에도 당연히 했고요. 마음에 드는 책을 수시로 열 권, 스무 권씩 사서 버릇처럼 여기저기 뿌리는 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실 겁니다.
이제 이런 후원 활동을 좀 체계적으로 하자, 그리고 마음 맞는 문인, 예술가, 활동가들이 부담 없이 아무 때나 모여서 우의를 나누고 세상을 걱정하며 미래를 꿈꾸어 보는 공간을 만들자, 그것이 ‘길동무’입니다. 마을의 사랑방처럼 편하게 여기시고 자주 놀러와 환담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2021년 3월 새봄을 맞으며
공동이사장 염무웅